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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대한 모든 것/China Story

광개토대왕릉, 직접 목격한 역사 왜곡의 현장..?!!

 

 

 

 

 

중국 동북의 지린성에 위치한 지안(集安)시.

압록강변에 위치한 이 작은 도시는 북한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서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압록강변을 벗어나 조금만 움직이면, 이곳에서 우리의 옛 기억과 만날 수 있다.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릉비가 바로 그것이다.

 

 

 

 

 

 

* 동방의 피라미드, 장군총은 장수왕릉…?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장군총의 모습>

 

 

 

 

동방의 피라미드라는 별칭을 가진 장군총. 중고등학교때 배운 지식에 기대자면 이것은 대표적인 돌무지무덤이다. 화강암을 가공하여 7층의 피라미드

형태로 쌓아놓았는데,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 규모가 생각보다는 엄청나게 크다. 밑에 사람의 크기와 대조가 되는 사진을 참고하여

보면 대충 장군총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스러운 것 중 하나는 장군총이 왜 ‘장군총’ 이냐는 것이다. 대부분의 고대 무덤의 이름은 그 무덤에서 나온 대표적인 출토 유물의 이름

을 따서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컨대 경주의 천마총이 대표적인데, 이는 발굴당시 출토된 말 그림이 그려진 장니 (말을 탈때 흙이 말의 배부분에 튀지

않도록 덮는 장식구- 로 알고 있다)  의 이름을 따서 천마총이 된 것이다. 그 밖에 무용총에서는 무용도가, 각저총에서는 각저(씨름) 도가 나왔다.

 

그렇다면 장군총에서는 도대체 무엇이 나왔길래 장군총이 되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군총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원래는 무엇인가 많이 매장되어 있었겠지만, 이미 다 도굴이 된 상태여서 남아있는것은

껍데기 뿐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이 위대한 동방의 피라미드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아마도 장군총이라는 이름은 무덤의 형식이나 크기, 그 풍기는 풍모가 너무 압도적이기 때문에, 무언가 위대한 장군의 무덤쯤 되지 않을까, 하는 추측에

서 이전부터 내려오던 이름이 아닐까, 하고 추측을 해보는 수 밖에 없다.

 

그런데,

20세기 이후 , 장군총의 주인이 정해지게 되었다. 이전부터 학계에서 장군총의 주인으로 유력히 지목되던 것은 두사람의 위인이다. 하나는 고구려 19대왕

인 호태왕(好太王) ,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광개토대왕이고 나머지 하나의 유력한 후보는 그의 아들인 20대 장수왕이다.

 

왕의 무덤은 곧 왕의 생전 권력을 측정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이기도 하다. 생전에 위대한 업적을 쌓고 나라가 부강하며 튼튼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다면

분명 그의 무덤또한 그 누구보다 크고 장대해질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동북 일대에서 가장 찬란하고도 위엄있는 이 무덤의 주인은 이 둘 중

하나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아무런 출토 유물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 무덤이 둘 중 누구의 것이다, 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장군총을 장수왕의 무덤이라고 결론내렸다. 중국에서는 공식적으로 장군총 = 장수왕릉으로 인정하고 있다. 분명 고구려의 최전성기

는 광개토대왕시기 시작되어 장수왕 시기를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우리는 흔히 광개토대왕을 최강(?!) 의 왕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국사 시간에 배웠듯이

의외로 최대 영토를 자랑하던 시기는 5세기 장수왕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수능의 그 유명한 한강 유역 점령과 관련한 최전성기 =  4 근초고 5 장수왕 6 진흥

왕 문제가 아니던가!!!! –.-

 

무덤은 자기가 생전에 만드는 것이 아니다. 결국 자기가 죽으면 그 아들이 무덤을 만든다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따지면 광개토대왕릉은 아들인 장수왕이

만들었을 것이고, 장수왕릉은 장수왕의 아들이 만들었다. 고 생각했는데, 장수왕이 이름처럼 97세까지 장수하는 바람에 장수왕 다음왕은 손자인 21대

문자명왕이다. 어쨌든 장군총은 그렇다면 그 문자명왕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자명왕은 이름조차 생소하다. 정말 문자명왕이 저 장군총을 만들었

다는 말인가?  

 

장수왕 말기 장수왕이 쇠약해지면서 고구려는 백제에게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전성기 시절 획득한 영토중 일부를 다시 빼앗기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수왕은 도읍을 중간에 평양으로 옮기고 평양에서 죽었다. 다시한번 고등학교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자. 장수왕 = 고구려 영토확장의

최전성기. 그리고 영토확장을 위한 그 유명한 남진정책을 통해 한강유역을 획득하게 되는데, 남진정책의 중요한 일환 중 하나로서 도읍을 상대적으로

남쪽에 위치한 평양으로 옮겼다. 이제 기억이 조금 나실 것 같은가?

 

그런데, 그 장수왕릉은 지안에 남아있다? 그리고 저렇게 거대하고 대단한 왕릉을, 전성기를 막 떠나보낸 문자명왕 시기에 조성했다…? 

 

 

 

 

 

 

* 광개토대왕릉비, 그리고 내 기억에는 없던 광개토대왕릉.

 

 

 

 

 

 

 

 

 

 

  중국에서 장수왕릉이라 주장되는 장군총을 본 후 광개토대왕비를 보러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둘은 걸어서 5분 정도의 같은 지역안에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비를 보기위해 들어선 입구앞 표지판에서 다시 한번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표지판에는 분명 왼쪽은 광개토대왕비,

오른쪽은 광개토대왕릉(?!) 이라 적혀있었다. 나는 분명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광개토대왕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분명 내가 알던 역사

대로라면, 장군총이 장수왕릉인지 광개토대왕릉인지 모르는 상황이며, 광개토대왕릉은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역사라는

것이 수학문제처럼 한가지 답으로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관점도 다 가능성은 인정을 해야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는 광개토대왕릉이

다! 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더구나 방금 장군총을 보고 왔는데 여기에 광개토대왕릉이 떡하니 있다니, 무언가 내가 알던

사실과 다른 눈앞의 현실에 무언가 혼란스러워진다.

 

그렇게 중국은  장군총= 장수왕릉 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못박아 두고 있었다.

 

 

 

 

 

 

 

* 너무나도 볼품이 없는 광개토대왕릉.

 

 

 

 

 

 

 

 

 

 

 

 

 

 

 

 

 

 

< 이 사진들이 모두 광개토대왕릉을 나타내고 있다. 혹시 생각속에 막연히 그리던 모습과 차이가 나지는 않는가…? >

 

 

 

유리벽과 콘크리트 건물에 둘러싸인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비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것이 광개토대왕릉이 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 근처의 허름한 전시실에서 70년 전과 20년 전의 광개토대왕릉의 모습을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가진의 큰 기본틀은 2009년의 그것과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너무나 유명한 ‘신묘년조 기사’ 가 실려있는 광개토대왕비의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고, 광개토대왕릉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자. 정말 이것이 여기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호기심을 자극했다. 애시당초 내가 원래 보려고 했던것은 광개토대왕비

까지만 이었다.

그런데 이 광개토대왕릉이라는 것이 일단 겉모습부터가 장군총과 비교하면 너무나 볼품이 없다. 정말 멀리서 바라보면 저게 무덤인지 공사장의 모래 자

갈 잡초를 섞어 쌓아 놓은것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다. 전혀 관리가 되지 않은 모습이다. 옛 고구려땅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최소한의 구색은 갖추어 놓으려 한지 모르지만, 대충 무덤 주변에 모아 둔 듯한 자갈 더미들이 눈에 자꾸만 거슬린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는 철문이 달려 있는데 다행인지 활짝 열려 있었다. 하지만 안에 발을 들이자 왕릉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싱거웠다. 정말

몇발자국 옮기지도 않았는데, 그것이 그냥 석실 내부의 끝이다. 그냥 사진에서 보이는 것이 전부다. 원래 관이 안치되어 있었을 자리에는 받침돌만 덩그

러니 냉기를 뿜으며 놓여 있고, 관광객들이 재미로 뿌리고 갔을 1원짜리, 5마오짜리 중국 지폐들만이 쓰레기처럼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아무리 생각해도 난 인정할 수 없었다. 이것이 정녕 광개토대왕릉이란 말인가?

 

중국이 어떠한 역사적 근거를 통해 이것이 광개토대왕릉이라 주장하는지는 배움이 부족한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저것이 광개토대왕릉일 가망성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광개토대왕비를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갈 수 밖에 없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실제로 보면 그냥

막연히 생각하는 비석이 아니다. 밑의 사진을 바라보자. 이는 전혀 왜곡없이 실제의 크기 그대로를 찍은 사진인데, 유리창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과 비교

해보면, 광개토대왕릉비가 얼마나 큰 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저건 왕의 무덤의 비석이기도 하지만, 저렇게 큰 돌덩어리의 존재 자체만으로 일반의

백성들에게는 신성 또는 권위의 상징으로 기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저런 비석을 가진 묘가 장군총도 아니고, 저렇게 볼품없는 묘란 말인가?

훼손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근거가 부족한듯 싶다. 비슷한 거리에 있는 장군총과 보존 상태가 저렇게도 차이가 나야 할 이유가 굳이

있었을까? 저기에만 벼락이라도 쳤다는 말인가?  더구나 광개토대왕릉을 발굴하고 그것을 광개토대왕의 묘로 확정시킨 중국 발굴단의 발굴과 연구

결과에 대해서는 일체 외부에 공개가 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더욱 의문이 커지게 한다.

난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도 아니고 전문가는 더더욱 아니다. 전문가가 아니기에 결국  ‘상식’ 적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저 비석과 묘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조합이다.

 

 

 

<광개토대왕릉비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직접 보면 그 ‘포스’ 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더욱 답답한 것 한가지는,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을 찾는 한국 단체관광객들이 꾸준히 이곳들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들은 모두

100% 조선족 현지 가이드를 끼고 직접 설명을 듣는다. 내가 장수왕릉과 광개토대왕릉을 방문했을때도 2팀 정도의 한국 관광객들이 조선족 가이드의 설명

을 받으며 이곳들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조선족 가이드들은 100% 장군총은 장수왕릉, 그리고 저기 볼품없는 저 무덤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설명하고 있었

다. 하기야 공식 표지판에 그렇게 되어있으니 그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들의 설명을 듣는 한국인 여행자들은 모두

아~그런가보다… 하고 곧이곧대로 그것들을 받아 들인다. 역사는 한가지의 정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실 처음부터 내가 잘못 알고 혼자 떠들어 댄 것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모두들 장군총= 장수왕릉, 광개토대왕릉= 저기 보이는 볼품없는 묘

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석인지도 모른다.

중고등학교 국사책의 가장 처음에 나오는 부분이 문득 생각났다. 여기서 E.H 카와 랑케라는 두 역사학자를 예로 들며 역사를 사실로서 볼 것인가

아니면 역사가의 주관이 개입된 기록으로서 볼 것인가 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분명 역사는 기록으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 역시 수학 문제처럼 한가지 답으로 떨어질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시각과 견해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하나의 정답을 만들어내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을 만들어낼 때에는

그 무엇보다 신중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중국이 내린 결론은 너무나 성급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증거도, 근거도 모두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그 어느 누구 한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한 어느 정도의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고구려문제 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중국의 태도에 해당하는 것인데. 아는 분들은 알겠지만 중국은 요즘 일년에도 몇가지씩

자신들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낸다. 사실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급속한 자본주의로 접어든 자신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사회주의를

대체해 사회를 통합시킬수 있을만한 이데올로기일테고, 그들은 그 대체로 역사라는 도구를 이용한 ‘민족주의’ 라는 이데올로기를 상정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너무나 조급하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가 아니다.

그들은 지금, 훗날 진짜 역사 앞에서 초라해 질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