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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대한 모든 것/사회, 문화

안중근, 박정희. 당신은 10월 26일을 기억하는가.

 

 

바야흐로 10월 26일이다.

한동안 잊고 있다가도 일년에 한번씩은 피할 수 없이 찾아온다.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10월 26일을 기억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1979년, 10월 26일의 기억이다. 80년대, 아니 이제는 그 기준을 90년대로 옮기는 게 더 좋겠

다. 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물론 80년대의 딱 중간에 태어난 나 역시 10월 26일에 대한 윗세대가 가진 그것만큼의

기억이나 느낌은 없다.

 

1979년 10월 26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내게 없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들어서, 또 보아서 알고 있는 사실은 그 때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운명을 달리 했다는 것. 그리고 그는 그를 좋아하고 따르던 많은 지지자들 만큼이나 많은 안티팬들을 지니고 있었지만,

서거 이후의 대세적인 분위기는 많은 국민들이 그의 국장 때 진심으로 슬퍼했다는 것이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 분도 많을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장 모습> (사진=중앙일보)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들이 있을 수 있으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죽음이 우리의 현대사에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 있을 수 없지만, 어찌되었든 그의 죽음으로 전두환이라는 또 다른 군부 세력이 등장해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 고난의 시간은 역설적으로 후일 민주화로 연결되어 우리 역사에 새로운 장을 가져다 주게 된다.

 

10.26 은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어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질때쯤 되면 그 날의 기억을 담은 영화와 드라마들이 다시

하나 둘 씩 나와 그 기억을 이어가게 만든다. (대표적으로 지금 생각나는 것으로 영화 <그때 그 사람들> 이 있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30년전의 그날을 기억한다. 특히나 박정희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구미에서는 많은 행사가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한국에서는 그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의 지지자들은 (그의 딸인 박근혜 국회의원의 지지자들을 포함하여)

다른 정치인들이나 정당을 따르는 지지자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열렬함’ 으로 무장되어 있다. 적어도 본인이 느끼기에는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지만,그 시대를 살아온 그분들만의 코드를 이해하기엔 나는 너무 어린가 보다, 하고 생각할 수밖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30년 전의 10월 26일과 그날의 총성만을 기억했다 .

하지만 그보다 더 이전, 100년 전의 10월 26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100년 전이면 도대체 언제야…?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이날은 없었다.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조국이 없다. 조국을 다른 나라에 빼앗겼다. 32살의 이 젊은이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했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의 하얼빈 역. 조국 침략의 원흉이 러시아와 회담을 하기 위해 이곳 하얼빈으로 온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젊은이는 가슴에서 권총을 꺼냈다. 탕 !!!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의 하늘에 7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 젊은이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안중근 의사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의 총성은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하였다.

그는 바로 체포되었고, 이듬해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안중근 의사 순국 전 원본사진>(사진=네이버)

 

 

안중근 의사는 한국과 북한 모두에서 위인으로 추앙받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이다. 기본적인 이념이 정반대인 두 나라에서 모두 영웅으로

추앙받는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역의 의거를 떠나서 인간적으로도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체포된 후

사형을 당하기 직전까지 그가 보여준 의연함과 바른 모습은 일본인 판사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를 죽이면서도 그의 인간성과

올곧은 모습에 끝까지 안타까워하며 감복해 마지 않았다는 것이다.

 

얼마전부터는 그래도 조금씩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듣자하니

광화문에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기념하는 안중근 의사의 손도장 현수막까지 등장 했다고 한다.

사람들의 관심과 기억도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기억할 것이지는 개인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아무도 강요할 수 없다.

  

 

다시, 이제는 역사라는 이름이 되어버린 이 부분들을 살펴보자.

 

 

1909. 10. 26.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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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79. 10. 26 .....

 

그 날, 김재규는 과연 알았을까...?

문득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