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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대한 모든 것/이런 곳으로 여행

잊지 못할 윤동주를 찾아 떠난 여행.

 

 

 

<윤동주 시인의 ‘서시’  친필 원고>

 

 

 

#1. 윤동주 시인, 그에 관해 기억하는 것들.

 

 

 

누군가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세요? 라고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윤동주’ 라고 말할 것이다. 아마 나 말고도 이와 같은 대답을 할 사람들

은 아마 무수히 많을 것이다. 윤동주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중 한 명이다.

 

윤동주, 혹은 서시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이 언제였는지 확실하게 기억이 나진 않는다. 하지만 중학교 때 우연한 기회로 국어경시대회를 준비하게 되면

서 윤동주의 작품을 많이 접할 기회가 생겼다. 비록 대회 때문에 ‘공부’ 의 목적으로 접하게 된 그의 시였지만,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때의 그 시들은 머리

보다도 가슴을 더 때렸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대학에 들어온 후 난 비록 문과대 소속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인 흥미를 쫒아 문과대의 수업을 꽤나 많이 들었다. 문과대로 올라오

는 길에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있었고, 그 위로는 윤동주 시인이 기숙사로 사용했던 건물이 서 있었기에, 문과대에 수업이 있던 나로서는 그 길을 꽤나

많이 지나다닌 듯 하다. 자주는 아니지만, 덕분에 가끔씩은 중학교 때 공부했던 윤동주 시인의 작품들을 떠올리기도 했고, 정말 날씨가 좋은 어떤날은

시비 근처의 벤치에서 친구들과 짜장면을 시켜 먹기도 했다.

 

지금까지 내가 가진 윤동에 관한 이런 기억 위에, 다시 또 한 토막의 기억이 더해지게 되었다. 2009년 중국으로 공부하러 오게 되면서, 윤동주 시인의

고향인 용정 땅을 밟을 기회가 생긴 것이다.

 

 

 

 

 

 

 

 

 

 

 

 

 

 

 

용정에서 윤동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은 그가 다녔던 대성중학교(지금은 용정중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도 이곳의 역사는 진행 중이다.) 이다.

용정은 우리에겐 의미가 깊은 곳이다. 박경리님의 소설 토지의 배경이기도 했고, 가곡 <선구자> 의 가사에 나오는 일송정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

다. 그리고 윤동주와 함께 문익환 목사도 이곳 출신이다.

 

 

 

 

 

 

 

 

 

 

이 곳에 와서 윤동주의 발자취를 돌아보니, 그는 참으로 복잡한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윤동주의 일가가 용정으로 올 때만 하더라도 이곳은 ‘중국땅’ 이라

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우리땅’ 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곳이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그곳은 주인 없이 버려진 땅이었고, 그 곳에 정착한 이들이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윤동주 일가도 그 중 하나였다. 그리고 용정을 떠나 그에게는 낯선 땅이었을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또 다시 더욱 낯선 일본으로 가서 공

부를 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 그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조선? 대한제국? 적어도 지금 우리 머릿속에 있는 ‘우리나라’ 와는 다른 모습이었지

않을까…

 

 

 

 

 

 

 

 

 

 

 

 

 

 

 

 

학교 앞에 윤동주의 시비가 있고, 시비에는 서시가 적혀 있었다. 문과대 앞에서 매일 지나치던 그곳의 윤동주 시비에도 서시가 적혀 있는데, 이렇게

시공간을 초월해 같은 내용이 새겨진 윤동주 시비를 보니 무언가 느낌이 묘했다.

 

 

윤동주의 시는 ‘부끄러움’ 의 미학이라고들 한다. 무엇이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쓰러져가는 조국의 모습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부끄러웠던

것일까. 훗날 많은 국어 교과서들이 그의 작품들을 해석하고 평가하고 문제도 만들어 수능에까지 여러 번 출제가 되었지만, 그 진짜 의미는 윤동주 자신

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의미가 어쨌든 간에, 중요한 것은 그의 작품을 접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그냥 그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

다. 저마다 느끼는 바는 다를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개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한편의 시가 개인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냐고?  적어도 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힘을 가진 것이고, 힘을 가진 문학을 했던 윤동주

라는 이름과 그의 작품이 지금껏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서시> 와 함께 가장 좋아하는 윤동주의 시는 <쉽게 씌여진 시> 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2. 윤동주, 그리고 그 후.

 

 

 

 

 

 

 

 

 

 

 

 

 

 

 

 

 

 

 

 

 

 

 

 

 

 

 

윤동주는 용정을 떠나 그렇게 낯선 땅을 헤매다 일제에 체포되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일제의 형무소에서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되어 명을 달리했

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윤동주는 용정을 떠났지만 이곳에는 그의 흔적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대성중학교는 용정중학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윤동주의 흔적들은 고스란

히 간직하고 있었고, 학교의 운동장을 뛰어 노는 아이들의 모습에는 왠지 모르게 윤동주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듯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운동장에는 용정 중학의 학생들이 저마다 축구며 농구를 즐기며 즐겁게 뛰어 놀고 있었다. 아마도 체육시간이었나 보다. 자기네들끼리 공놀이에 빠져있

다가 문득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신기했던지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물론 나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말이었다. 이들이 윤동

주의 후배들이다. 그리고 이들도 아마 커가면서 윤동주처럼 ‘경계인’ 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한 켠에는 윤동주와 항일운동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다른 한편의 게시판에 쓰여진 중국의 건국 60주년을 경축한다는 알림은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이들을 어떤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해야겠다는 나만의 잣대를 던져버리고 나자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다.

 

 

용정에 와서 윤동주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 나니, 조금 더 그와 가까워 진 느낌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가 서울에서 기숙사로 사용했던 핀슨관 앞

윤동주 시비를 찾아 거기에 쓰인 서시를 조용히 읊어봐야겠다. 학교를 꽤 오래 다녔지만 아직 시비를 유심히 본 적은 한번도 없는 것 같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